1. 합리론
합리론이란 인식론에서 지식의 제일 근원을 합리론, 합리주의, 또는 이성주의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합리론은 철학의 시작점을 주관으로 보고 오로지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만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근대 유럽의 철학적 흐름이다.
합리론에서는 진리의 기준을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이나 이론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합리론자는 우리의 개념과 지식이 감각적 경험에서 독립하여 얻어지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경험론자는 감각적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개념과 지식의 궁극적인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이성주의자들이 '합리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경험이 아닌 이성에 근거하여 인식론이든 윤리학이든 형이상학이든 자신 철학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주의자들이 경험주의자들보다 '합리적'이라서 합리론자라고 불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경험론자가 더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합리론자는 '이성'의 지위가 경험론자에 비해 높았기에 이성주의 합리론이라 불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들 이성주의자가 경험론자들보다 합리적인 가치를 추구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당대 시대적 상황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전의 중세철학은 철저히 신학적 입장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철학적 탐구 대상의 확실성은 모두 신이 보증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철학의 경우 신과 결별하고 확실한 진리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을 신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나'라는 '주체'로 잡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인식되는 탐구의 대상이 확실한 것인지, 그것이 인식하는 주체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이 된 것이다.
오랜 논쟁에서 합리론은 경험론의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합리론자는 실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합리론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든 또는 모르든 간에 어떤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고도로 발달한 지성은 이러한 진리를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합리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올바른 어떤 이성적인 원칙이 논리, 수학, 또는 윤리학, 형이상학에 존재하며, 이를 부정하면 할수록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합리론자들은 이성에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경험론자들과는 다르게 경험적인 증거나 물리적인 증거는 진리를 획득하는 데에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우리의 개념과 지식이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얻어지는 두드러진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나 이론을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는 "지식을 획득하는 다른 방법에 비해 우월함을 가지고 있다"는 온건한 입장부터 이성은 "지식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는 극단적 입장까지 다양한 합리주의적 관점을 낳았다. 전근대의 이성에 대한 이해를 고려할 때, 합리론은 소크라테스의 질문하는 생애나 권위에 대한 회의주의자의 명쾌한 해설로서의 철학 그 자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 계몽주의 이래로 합리론은 공화주의, 세속주의, 무종교(종교적 또는 무종교적 이념과 관계없이 실현할 수 있는 다원론적 합리주의 방법론의 공리주의를 적용하여 수정된 후기 양상의 반신론)에 집중된 "이성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자 존 커팅함(John Cottingham)은 방법론으로서의 합리주의가 세계관으로서의 무신론과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강조하였다.
2. 르네 데카르트(1596년~1650년)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연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이다.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 확신하고는, 이를 모든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하였다.
라 프레스의 학교에서 스콜라 식 교육받고 라 프레스를 졸업하곤, 바로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의학을 배웠고 2년 뒤 20세의 나이에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군대에 지원했다. 데카르트는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 계발하였다.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해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가 수학, 과학연구에 힘썼다. 말년에 스웨덴 여왕의 초대를 받았으나. 다음 해에 병사했다. 파리 인류 박물관에 그의 두개골이 전시되어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학문의 제1 원리를 기반으로하여 다시 신 존재를 증명해내고, 이를 다시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마련하여, 마침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물질 세계의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의 순서를 제시한다. 그리고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 즉 '연장'에 있다고 보고, 이로써 물질 세계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공간이며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이후 근대의 수많은 학자들을 자극시켜 자연과학과 수학에 있어서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서양이 중세를 벗어나게 된 그 결정적인 동력을 데카르트가 제공하였기에 그를 두고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3. 대륙 합리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대륙 철학자들은 영국에서 발전한 영국 경험론과 다른 사상을 가졌다.
그들은 사람은 잘못 볼 수 있고 실험 결과 또한 잘못될 수 있다. 때문에 오감을 통한 경험 또는 체험은 믿을 수가 없다고 여겼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신이나 선악의 관념을 갖는다고 생각한 데카르트는 생득관념(사람이 태어나면서 인간 정신에 내재하여 있다는 관념)이 존재한다고 봤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데아를 알고 있다는 플라톤의 사상과 연결된다. 데카르트는 이 생득관념에 의지해 연역법으로 올바른 지식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상은 주로 유럽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대륙합리론이라고 불린다. ‘대륙합리론’은 생득관념이 없다고 보는 ‘영국경험론’과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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