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354년).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에 매료된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455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 지중해권 물자 유통망도 곳곳의 이민족 출몰로 막히면서 제국 경제권 또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중세 기독 신학의 뼈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이처럼 야만족의 칼날에 천년 문명이 무너져내리던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기구하게도, 그의 출생 40여년 전인 313년 기독교는 공인됐고, 장년기인 392년 국교가 됐으며, 숨진 지 20여년 만에 제국은 사라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초기 기독교를 세운 바울이나 종교개혁자 루터와 닮았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11살 때부터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등 로마 현자들의 고전을 읽었던 그는 평생 지혜를 갈망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켰다. 구약의 온갖 잡설과 모순을 교리상으로 풀지 못한 채 제국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한 당시 기독교에 염증을 느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젊은 시절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선악의 철저한 이원론을 주장하는 동방 마니교에 심취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한때 마니교와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384년). 밀라노에서 접한 신 플라톤 철학,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 수도 생활에 관한 증언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교수직과 재산에 미련 없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소박한 수행의 삶을 엮어 가던 그는 뜻하지 않게 교구의 사제(391년)와 주교(395년)로 서품되었고, 40년 가까이 사목자요 수도승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다가 석 달 남짓한 투병 끝에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30년).
2. 인성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원래 신에 의하여 자유로웠으나,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이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영원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의 성품을 닮아 죄악을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죄가 있으므로 사람은 아무리 바르더라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할 힘도 없고, 또한 자기의 죄 사함을 요구할 권리도 없다. 다만 신은 정의롭고 자비가 있으므로 구세주를 보내어 사람을 구한다. 이것이 신의 은총이다. 다만 신은 사람의 죄를 사해 주는 대신 그 죄에 대하여 배상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하여 그 배상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매개에 의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 승천 후의 구제의 업(業)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의 대행자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있어서는 교회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이처럼 하여 인성론 문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심취하고 광활한 사색과 풍부하고 열렬한 감정으로써 기독교적 신학 체계를 세운 교부철학의 중심인물이었다.
3. 인식과 신의 조명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식은 영원불변의 '이데아'의 관조이다. 육체는 이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경우와 같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감각으로부터 추상이라는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진리의 인식은 인간이 자신 내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이 자신 내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은 '상기'하기 때문이며 여기에서도 플라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상기설은 영혼의 선재라는 신화적인 사고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을 부정한다.
그에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은 영구불변의 진리 인식이 유한가변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인간은 진리를 자기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외부에서 받지도 아니한다.
우리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신이 무한의 빛으로써 우리의 이성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즉 예컨대 논리학, 수학, 윤리학, 기타 학문에서 진리의 파악도, 영원한 진리인 신에 도달하는 것도 신의 빛의 조명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인 조명설이다. 이것은 계시가 인식에 불가결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알기 위해서는 믿어라.'라고 말한다. 안다는 것은 신앙의 결과이며 보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 하는 것'이 '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이상 이성은 계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비록 계시의 진리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계시를 믿을 여지가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오히려 계시의 보조자이며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믿기 위해서는 알라'라고도 말하고 있다.
4. 세계창조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 만물은 신이 무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원초적인 물질에 신이 형상을 줌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은 창조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공 혹은 건축기사와 같은 것으로서 원초적인 물질, 즉 질료(質料)는 창조 이전의 재료로서 이미 있는 것이요, 그것마저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자기의 의사에 의하여 질료에 다만 형상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정통 그리스도교도처럼 세계 만물은 어떤 질료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은 질서나 배열(排列)뿐만 아니라 원초적인 질료조차도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곧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신앙 고백이 되지만, 이 신앙을 통하여 그는 플라톤의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무에서 창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리스적인 견해는 기독교 시대에도 때때로 주장된 것이며, 이것은 범신론(汎神論)을 만들어 냈다.
5.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의의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이교도 철학을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추구하는 도구로 삼았다. 물질주의가 판치는 난세에는 결국 신의 구원을 이성적 신앙의 반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교부신학의 정립 과정을 필생의 지적 탐구를 통한 변증법적 사유의 맥락으로 풀어냈다. 고백록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책, 서간, 설교)과 극적이고 치열한 삶은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교부들 가운데 우뚝 솟은 큰 산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 체계 속에 그리스도교 진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냄으로써 ‘서양의 스승’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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