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덤 스미스(1723년 ~ 1790)- 자유 방임주의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도덕 철학자이다. 글래스고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28살에 글래스고 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재임 중에 ‘도덕 감정론’을 발표해 평판을 얻었다. 교수직을 사임한 뒤 귀족 가정교사로 일하며 유럽 대륙을 여행했다. 귀국 후 경제학을 체계화한 ‘국부론’을 집필해 자유주의와 자유 무역론을 주장하였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행동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 사회 전체 이익을 증진한다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했다. 스미스는 타인의 공감을 얻는 범위 내에서 이기심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정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경제가 유럽으로 전파됐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자유경쟁에 의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과연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다줄까? 여기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대답은 ‘yes’였다. 그는 개인의 이익 추구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돼 자연히 모두의 이익으로 연결된다고 봤다. 그러므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2. 제레미 벤담(1748년~1832년) - 공리주의
제레미 벤담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이다. 벤담은 공리주의의 창시자라 불린다. 런던의 유복한 법률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횄고 21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변호사 사무실보다 법이론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 후 선거권 확대를 위해 선거법 개정에 집중하는 등 자유주의에 근거한 정치 개혁 활동에 힘을 쏟았다.
벤담은 인간이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어떤 행위가 인간의 쾌락으로 이어진다면 그 행위는 선, 고통으로 이어진다면 악이라고 정의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쾌락이 있는가에서 찾는 것을 ‘공리주의’라 한다.
선악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공리주의는 지금도 윤리학과 정치학 등의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담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쾌락과 고통을 수치로 나타내려 했다. 그는 쾌락이 강함, 지속성, 확실성 등의 기준으로 계산했다. 이것을 쾌락 계산이라고 한다. 그는 쾌락 계산으로 나온 점수가 높은 개인이 많은 사회일수록 행복한 사회라고 봤다. 신분이 높은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동등하게 점수를 환산하는 이 사상은 민주주의 발전에 대단히 공헌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은 평등하게 1명으로 센다. 그 누구도 그 이상으로 세지 않는다.”
벤담은 쾌락 계산으로 나온 점수의 총점이 높은 사회일수록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벤담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높은 쾌락 지수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입법 기준으로 삼았다.
3. 카를 마르크스(1818년 ~ 1883년) – 공산주의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본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 철학, 역사를 공부했고 헤겔 좌파 지식인 그룹에도 가입했다. ‘라인 신문’의 주요 필자였으나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실직해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벨기에, 파리, 독일로 옮겨 다니다 1849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대영박물관에 틀어박혀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파트너인 엥겔스에게 자금을 지원받으며 공산주의 사상을 확립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등장하는 구절로 공산주의 표어로 가장 유명한 말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 같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을 유물론이라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이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경제 경쟁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빈부 차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계급은 토지와 공장, 설비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피하려면 토지나 공장, 설비 등 생산수단을 사유하지 말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살려면 의식주가 필요하다. 의식주에 관계된 것을 생산하는 설비, 토지, 원재료를 생산수단이라 한다. 봉건제에서 소작인과 대비되는 봉건영주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와 대비되는 자본가처럼, 생산수단을 지닌 자는 지배계급이 된다. 생산수단의 유무에 따른 이러한 상하관계를 생산 관계라 한다. 생산 관계가 완성되면 지배계급은 그 제도를 유지, 고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생산력(생산물을 공급하는 능력)은 기술 혁신에 따라 계속 발전한다. 그러면 고정된 생산 관계는 과도하게 증대하는 생산력의 발전을 억누르려고 한다. 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이 마침내 계급투쟁(사회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생산 관계 시대를 낳는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대는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순으로 진보한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사는 시대의 생산 관계를 의식하지 못한 채, 마치 자신의 의견처럼 떠드는 주의나 주장을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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